[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 의자왕, 뛰어난 전략으로 신라와의 경쟁에서 앞서
민심 얻고 거듭된 전쟁에서 승승장구 했으나 왕권 너무 커지자 현명함 잃어

부여군 규암면 외리 유적에서 발견된 산수 산경 무늬 벽돌(왼쪽)과 도깨비 무늬(오른쪽) 벽돌. 6~7세기 백제 사비성(부여)의 도로에 깔렸던 것으로 당시 백제 문화와 경제력을 보여준다.

일본 정창원에 소장된 백제의 화려한 바둑판.

■ 왕권 강화 위해 노력

백제 30대 무왕은 41 년간 임금으로 있으면서 백제의 힘을 키우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무왕은 왕비가 신라의 선화 공주였지만 신라와 잦은 전쟁을 했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의자 왕자는 어머니가 신라인이라는 것 때문에 임금이 되기까지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의자 왕자는 무왕이 임금이 되기 전인 595년에서 600년 무렵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40 세 무렵인 632년에야 뒤늦게 태자가 됩니다.

의자 왕자는 이복 형제들과 우애가 깊고, 부모에게 효도를 잘하여 '바다 동쪽의 증자'란 뜻의 '해동증자'로 불리며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지요. 증자는 효성이 지극했던 중국의 유학자랍니다. 이는 의자 왕자가 태자가 되고 임금이 되기까지 자신을 낮추고 많은 것을 참으며 조심스러운 행동을 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자 태자는 641년 임금이 되자 국내를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고, 죄수를 풀어 줘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자 했답니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용감하고 담대하며 결단력이 있다고 적혀있습니다.

그의 아들인 부여융의 무덤에 적힌 글에는 의자왕이 침착하며 생각이 깊어 많은 사람들이 칭찬했다고 나와 있답니다. 의자왕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나라를 망친 어리석은 임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 백제는 임금보다 귀족의 힘이 강하다는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의자왕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큰 공을 세우고자 했답니다. 그는 임금이 된 다음 해인 642년 7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여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지요.

또한 그 해 8월에는 장군 윤충을 시켜 1만 명의 군사로 신라의 중요 성인 대야성을 빼앗는 성과도 거두었답니다. 백제 성왕이 신라군에게 목숨을 빼앗긴 이후로 무려 90 년 만에 신라를 크게 물리친 것이지요.

이 때 신라는 너무도 크게 패해 마치 나라가 망할 것과 같은 위기 의식을 느꼈습니다. 신라는 고구려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고구려는 국력이 강해진 백제를 택했지요. 의자왕은 비록 고구려가 오랜 적국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 643년 신라의 서해안 진출 통로인 당항성을 공격하게 됩니다.

645년에 고구려와 당나라가 전쟁을 하자, 당나라 편에 선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의자왕은 이 때 신라의 허점을 노리고 공격해 7 개 성을 빼앗습니다.

655년에는 고구려,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 북쪽의 30여 개 성을 점령하기도 했지요. 이 때까지 의자왕은 국제 관계의 흐름을 정확히 판단하고 전략을 세워 즉시 실행에 옮기는 과감함을 보였지요. 의자왕은 신라와의 거듭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경쟁에서 앞서 갔습니다.

■ 아들 41명 최고 관직 임명 후 국력 '흔들'

당시 백제는 보름달, 신라는 반달에 비유될 정도였답니다. 이렇게 바깥으로 성공을 거둔 의자왕은 마침내 내부 문제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는 655년 무왕의 왕비이자, 자신의 계모가 죽은 것을 계기로 계모의 친정을 비롯한 귀족 세력들을 대거 쫓아냅니다. 왕의 권력을 견제하던 힘센 귀족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도리어 백제의 불행으로 다가왔습니다. 의자왕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졌고, 누구 하나 그의 행동을 막을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의자왕은 자신의 마음대로 정치를 펼쳤습니다. 특히 아들 41 명을 모두 백제의 최고 관등인 좌평에 임명하고 각기 식읍이라 불리는 땅을 나누어 주었지요. 이는 왕권을 강화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지만, 백제의 국력을 흐트러뜨렸습니다.

신하들은 임금의 잘못을 비판하지 못했고, 아첨하는 말만 하게 되었지요. 젊은 시절의 예의 바르고 효성이 지극했던 모범생 의자왕은 이제 술 마시고 노는 일에 정신이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백제의 불행은 이렇게 싹이 트고 있었습니다.


김용만(우리 역사 문화 연구 소장)


입력시간 : 2007-10-30 1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