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 계백의 5000 결사대 황산벌서 '최후의 전투'
신라 5만·당나라 13만 대군 연합…향락에 빠진 의자왕 때늦은 대응

충남 부여군청 광장에 있는 계백 장군 동상

■ 당나라와 신라의 공격을 받은 백제

660년 7월 백제와 신라간에 황산벌 전투가 벌어집니다. 백제가 멸망에 이르게 된 이 전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의자왕이 향락에 빠진 사이, 신라는 호시탐탐 백제를 멸망시킬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혼자 힘만으로는 백제를 이길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던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입니다. 마침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거듭 패하자 복수할 방법을 찾고 있었지요. 신라가 제안한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킬 계획은 적극 환영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백제와 당나라는 사신 왕래는 뜸했지만, 그렇다고 원한을 살 만한 일도 없었어요. 백제를 공격하려면 많은 함선과 병력으로 황해를 건너야 했던 만큼, 단독으로는 침략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는 이 계획을 알아채지 못했지요.

당나라는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준비했던 대규모의 함선을 이용해, 13만 대군을 출동시킵니다. 신라도 무열왕과 김유신이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5월 26일 출발, 6월 18일 지금의 이천 지역인 남천정에 모였지요. 신라군은 이곳에 대기한 뒤, 6월 21일 덕적도에서 당나라 대군을 만납니다. 이 때 두 나라는 7월 10일 백제 사비성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지요.

이 때까지만 해도 백제는 두 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해 방어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뒤늦게서야 두 나라의 공격 목표가 백제임을 알게 되었지요. 의자왕은 서둘러 적을 방어할 준비를 시작합니다.

황산벌로 추정되는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와 신암리 일대.

하지만 때는 이미 늦고 말았습니다. 신라군은 이천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지금의 상주 지역을 거친 뒤 다시 지금의 논산 지역인 황산벌로 진격합니다. 또 당나라 군대는 배를 이용해 금강 하구로 상륙하여 곧장 부여 사비성을 향했습니다.

그러자 의자왕은 의직을 사령관으로 하여 당군을 막도록 합니다. 하지만 의직의 군대는 13만 대군을 막기에 부족했습니다. 당나라 군대는 쉽게 백제군을 물리치고 사비성에 도착할 수 있었지요.

■ 황산벌 전투

반면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백제군에 발목이 잡혔습니다. 계백이 이끄는 5000 명의 결사대 때문입니다.

7월 9일 신라군이 황산벌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은 이미 산직리 산성, 모촌리 산성, 황령 산성 3 곳에 진영을 두고 기다리고 있었지요. 당시 백제 두 번째 관등인 달솔 계백은 최고 직위인 좌평 충상, 달솔 상영과 함께 백제군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논산에 위치한 계백 장군의 무덤

이 때 가장 용맹하게 신라군과 싸운 것은 바로 계백의 5000 결사대였지요. 신라 5만의 군대와 맞선 것은 계백뿐 아니라 추상과 상영도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5000 명이 아니라 3 배 정도인 1만 5000 명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 때 백제군은 세 갈래 길로 진격해 오는 신라군을 맞이해 네 번 싸워 모두 승리를 거둡니다. ‘삼국사기’에는 이 때 거듭 패하던 신라군이 승리할 수 있게 된 것은 화랑인 반굴과 관창이 어린 나이에 전투에 나서 목숨을 잃자, 크게 분발해 백제군을 무찔렀기 때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결국 충상, 상영 등 30여 명의 장수들이 사로잡히며 크게 패하고 맙니다. 계백은 끝까지 신라군과 싸우다가 마침내 전사합니다.

신라는 백제를 물리친 뒤, 곧장 내리 달려 7월 12일 당나라 군대와 함께 사비성을 포위합니다. 이제 백제는 멸망의 순간만을 남겨놓은 것이지요.

의자왕은 처음에는 신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백제는 보름달, 신라는 반달’에비유될 만큼 국력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자만하기 시작하고 나태해지면서 마침내 역전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김용만(우리 역사 문화 연구 소장)


입력시간 : 2007-11-20 1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