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화가 우리 그림] 전설 속의 두 천재 화가, 솔거와 담징 ①
솔거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이 뛰어났지만 아무에게도 그림을 배울 수가 없었다. 그저 혼자서 막대기로 땅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낫 끝이나 호미로 붓을 삼아 새와 사람 등을 그릴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솔거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수염이 허연 백발노인이 나타나 말했다.“솔거야, 나는 민족의 시조인 단군왕검이니라. 너에게 이 붓 한 자루를 줄 터이니 그림 솜씨를 갈고닦거라!”솔거는 깨어나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손에는 정말로 붓 한 자루가 쥐여 있었다. 솔거는 그 붓을 가지고 꿈에서 본 단군의 모습을 1천 장도 넘게 그렸다. 그리하여 솔거는 훌륭한 화가가 되었다.어느 날 솔거는 황룡사 벽에 그림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황룡사는 신라에서 제일가는 큰 절이라 솔거는 정성을 다해 그림을 그렸다. 그림이 완성되자 사람들은 입이 쩍 벌어졌다. 늙은 소나무를 그린 <노송도>였는데, 꾸불꾸불한 줄기며 뾰족뾰족한 솔잎이 너무도 진짜 같아 마치 살아 있는 듯했다. 그 뒤로 가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소나무 그림 아래에는 이따금 참새, 까마귀, 제비 등이 죽어 있곤 했다. 새가 멀리서 날아와 진짜 소나무인 줄 알고 앉으려다 벽에 부딪혀 죽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자 <노송도>의 색깔이 바랬다. 스님들은 안타깝게 여겨 그림 위에 덧칠을 했다. 그 뒤로 다시는 벽으로 날아와 부딪혀 죽는 새가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솔거에 대한 짧은 기록이다. 솔거는 <노송도> 외에도 경주 분황사의 <관음보살도> 등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은 작품이 하나도 없다. 그럼 점에선 일본에 건너가 활약한 담징도 비슷하다. 전설 속에서만 이름이 빛나는 솔거와 담징,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 여행을 떠나 보자.

솔거는 ‘사실주의’ 화가?솔거의 삶과 그림은 장막에 가려져 있다. 심지어 솔거가 태어나고 죽은 해가 언제인지도 수수께끼이다. 다만, 그가 그림을 그렸다는 황룡사나 단속사의 완공 시기로 미루어 통일 신라 시대의 화가이리라 추측할 뿐이다.그렇다면, 솔거가 어떤 그림을 그린 화가였는지 전혀 알 길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비록 그림은 남지 않았지만 어떤 그림을 즐겨 그렸는지는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전설을 다시 꼼꼼히 되짚어 보자. 그러면 솔거의 그림이 매우 사실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새가 진짜 소나무로 착각할 정도였으니까.하지만 그림을 평가할 때, 사진보다 세밀한 사실화라고 해서 무조건 훌륭한 작품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현대 미술에서는 때로 추상화가 걸작으로 대접받기도 한다. 솔거가 살던 시대는 사실적인 그림을 높게 치는 분위기였으며, 따라서 <노송도>를 그린 솔거야말로 최고의 화가로서 전설이 되어 남은 것이다.

황룡사 <노송도>가 전해지지 않는 이유는?<노송도>가 있던 황룡사는 삼국 시대 최대의 절이다. 크기가 불국사의 여덟 배라니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신라에는 귀한 보물 세 가지가 있었는데, 황룡사 구층탑과 장륙존상, 그리고 하늘나라 임금이 내렸다는 허리띠인 ‘천사옥대’이다. 신라의 보물 중 두 가지가 황룡사에 있었던 셈이다.구층탑은 황룡사의 상징물과도 같았다. 맨 아래층부터 일본, 중국, 말갈, 여진, 오월, 예맥, 응유, 단국, 탁라 이렇게 아홉 나라를 상징하는데, 이들의 침략으로부터 신라를 지켜 내겠다는 뜻이 담겼다.구층탑은 나무로 만든 탑으로서 높이가 80미터에 달했다고 한다. 정말 보기에도 아찔할 만큼 어마어마한 높이이다. 지금까지 남았다면 인도의 타지마할이나 이집트의 스핑크스 못지않은 세계문화유산이 됐을 것이다.장륙존상은 황룡사의 불상인데,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어느 날 이상한 배 한 척이 남해 바닷가에 닿았다. 배에는 인도의 아쇼카 왕이 쓴 편지가 있었다. 아쇼카 왕은 불교 발전을 위해 애쓴 임금이다.‘내가 석가삼존상을 만들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황금과 철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으니, 인연이 있는 나라에 닿으면 장륙존상을 만들길 바란다.’배에는 불상 하나와 두 보살을 그린 그림이 함께 실렸는데, 이를 본떠 만든 것이 바로 장륙존상이다. 하지만 황룡사는 고려 때 몽고의 침략으로 불타고 말았다. 이 때문에 두 보물은 물론이고 <노송도>도 잿더미에 묻혔다./자료 제공: ‘암각화부터 이중섭까지 우리 화가 우리 그림’(지은이 장세현ㆍ학고재)

<사진 설명>진파리 1호 무덤의 소나무 그림. 솔거의 <노송도>도 이런 모습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