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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특집] 소파 방정환 선생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벗이세요


소파 방정환 동상. 1973년 문을 연 어린이대공원 안에 있다.
어린이를 안고 있는 소파 방정환 동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5월 5일 신나는 ‘어린이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이들도 많을 거예요. 어린이날에는 우선 학교도 안 가고 여러 가지 축하 행사가 있어서 어린이들을 즐겁게 해 주고 있습니다. 이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이 바로 방정환 선생입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어린이날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23년, 일본에 유학을 간 방정환ㆍ손진태ㆍ고한승ㆍ정순철ㆍ정병기ㆍ윤극영 등은 ‘색동회’라는 어린이를 위한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색동은 우리 나라 어린이들이 입는 저고리 소매에 오색 빛깔의 비단 조각으로 층을 낸 것으로, 순 우리말이지요.

색동회 회원들은 어린이들을 위한 글을 쓰고, 동요도 만들고, 동화 구연 대회를 열기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강연회 등을 갖기로 하는 등 갖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방정환은 또 색동회 회원들에게 ‘어린이날’ 제정을 건의했습니다.

“우리 나라가 잘 되려면 자라나는 어린이에게 미래를 열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길을 열어 주도록 합시다. 우선 그 시작으로 어린이날을 만드는 것이 좋겠소. 1 년에 한 번이라도 어린이들에게 기쁨과 자유를 마음껏 주어야 합니다. 일 년 중에 날씨가 가장 좋고 만물이 소생하는 5월이 좋을 것 같아요. 그것도 5월의 첫날이 좋겠어요.”

이렇게 해서 1922년 5월 1일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어린이날이 동경 유학생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방정환은 서울 천도교소년회에 연락하여 준비를 한 끝에 1923년 5월 1일 첫 어린이날 행사를 서울 천도교당에서 개최하였습니다. 방정환이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사위였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최초의 어린이날 기념 포스터. 방정환 선생이 제정한
어린이날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 당시 약 1만여 장을
인쇄하였다고 전한다.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에는 약 1000여 명이 참석하였고 개성ㆍ김해ㆍ진주ㆍ대전ㆍ공주 등 지방에서도 어린이날 잔치가 열렸습니다. 이 날 각 행사장에서 나누어 준 방정환의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호소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반성을 하게 하였습니다. 당시 어린이들은 인격적으로 인정받지 못 하고 어른에 대한 ‘효’만을 강요 당했습니다.

방정환 선생에 의해 만들어진 어린이날은 정부에 의해 1946년에 5월 5일로 바뀌기까지 해마다 5월 1일에 잔치를 했습니다.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의 만남

방정환은 열아홉 살 때, 3ㆍ1 운동을 주도한 민족 대표 33 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권병덕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 제3대 교주인 손병희를 만나게 됐습니다. 손병희 선생은 청년 방정환이 살아온 내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집안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일찍이 ‘소년입지회’ㆍ‘청년구락부’를 만들어 조국 독립의 주춧돌이 되고자 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방정환은 1919년 3월 1일, 독립 만세 운동이 불꽃처럼 일어나자 그가 조직한 청년구락부 회원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 만세 행렬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만세 운동으로 ‘조선 독립 신문’이 중단되자 청년구락부 회원들과 밤을 새워 원고를 쓰고, 등사판(인쇄기의 하나)으로 인쇄를 하여 경찰의 눈을 피해 가며 집집마다 배달을 했습니다. 그러나 3 주도 못 가서 형사들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방정환, 네놈들이 신문을 만든 걸 다 안다. 빨리 말하지 못 할까?”

경찰서에서 참을 수 없는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증거를 찾?못한 경찰은 할 수 없이 방정환을 석방했습니다. 경찰서에서 나온 후에도 방정환은 계속해서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잘 알고 있던 손병희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을 방정환 선생과 결혼시킨 것입니다.

“자네의 인간 됨됨이가 마음에 드네. 내 딸 용화와 혼인을 하도록 하게.”

당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이끌고 있었던 천도교 대표의 딸과 결혼을 한다는 사실에 방정환은 몹시 기뻤습니다. 그리고 손병희 선생의 사위가 됐으니 방정환은 이제부터 우리 나라 어린이들을 위해 일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어린이 문화 운동에 헌신

“우리 나라의 암울한 현실을 이겨 낼 수 있는 것은 어린이밖에 없습니다.”

방정환은 자신의 일생을 어린이 운동에 바칠 것을 약속하고는 하나씩 실천에 옮겨 나갔습니다. 방정환은 결혼 후에 학교 공부도 했고, ‘어린이’ 잡지도 만들었습니다. 동경 유학생들이 만든 색동회 일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요, 동화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경성과 도쿄를 오가면서 어린이날 행사도 준비하였고, 지방으로 돌아다니며 동화 구연도 하고, 아동 문학 강연회도 하는 등 어린이 운동에 온 힘을 쏟아 부었습니다.

“우리 어린이들이 밝고 슬기롭게 자라려면 예술에도 눈을 떠야 합니다.”

‘어린이’ 잡지를 발간하면서 방정환은 우리 나라 최초로 세계 아동 예술 전람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928년 10월 2일. 세계 아동 예술 전람회가 준비 4 년 만에 천도교 강당 문화관에서 막이 올랐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4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갈 정도로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방정환은 항상 머리가 아프고, 몸에 열도 오르고, 코피까지 자주 흘릴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습니다. 하지만, 그런 몸으로도 어린이들이 찾으면 거절하지 않고 달려가 동화 구연과 강연을 열정적으로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끝내 방정환은 과로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고혈압과 신장염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가야겠어. 문 앞에 마차가 왔어.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어. 어린이들……. 어린이들을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도 어린이들을 걱정하고 당부의 말을 잊지 않은 방정환은 1937년 7월 23일 서른세 살의 아까운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색동회에서는 방정환 선생의 훌륭한 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57년 그의 호를 따서 ‘소파상’을 제정했습니다. 해마다 어린이날에 어린이들을 위해 빛나는 일을 한 사람들에게 이 상을 주어 그의 정신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즐겁기만한 어린이날이지만, 어린이를 위해 애쓴 방정환 선생을 한번쯤 기억해 보세요. /김남석(작가)

<방정환 연보>

1899년 서울 야주개(당주동)에서 태어남.

1905년 보성소학교 입학.

1908년 '소년입지회'조직.

1913년 선린상업학교 입학.

1917년 천도교 입교. 손병희의 딸 손용화와 결혼. '청년구락부' 조직.

1918년 보성전문학교 입학. 청년구락부 회지 '신청년' 펴냄.

1919년 3ㆍ1 운동에 참가. 발행이 중지된 '조선 독립 신문' 발행.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 대학 철학과에 입학.

1921년 천도교소년회 조직.

1922년 동화책 '사랑의 선물' 펴냄. '어린이'라는 말 처음 사용. 어린이날 제정.

1923년 우리 나라 최초의 어린이 잡지 '어린이' 발간. 색동회 조직. 제1회 어린이날 행사 개최.

1924년 전국을 다니며 강연회 및 동화 구연.

1925년 동화 구연 대회 개최.

1928년 세계 아동 예술 전람회 개최.

1931년 세상을 떠남.

1957년 소파상 제정.


입력시간 : 2004-04-28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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