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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속 인물] 안익태 선생


안익태(安益泰ㆍ1905년~1965년)라는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애국가'를 먼저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우리 겨레가 부르는 우리 나라의 노래(국가ㆍ國歌)를 그가 작곡했기 때문이다. 제7차 교육 과정에 따라 새로 사용되고 있는 초등학교 교과서 '도덕'(3-2)의 4단원 '나라 사랑의 길'에 안익태 선생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일생을 살펴본다.

안익태는 1906년 평양에서 여관 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지녔던 그는 6 세 때 동네 예배당에서 흘러 나오는 찬송가에 이끌려 식구들 몰래 교회에 나가 노래를 따라 불렀다.

7 세 때 처음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6 개월간 연습한 후 찬송가를 연주할 수 있게 됐다.

1914년 평양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예회 때마다 바이올린과 트럼펫을 연주하며 마음껏 재능을 뽐냈다.

그 무렵, 평양에는 선교사들이 세운 신식 학교가 많았다. 안익태가 들어간 숭실중학교도 그랬다. 이 학교의 교사들은 거의 모두 선교사였다. 소년 안익태는 교장 마오리 선교사로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웠다. 또 방학 때는 서울까지 가서 캐나다 선교사로부터 첼로를 배웠다.

3ㆍ1 운동에도 앞장 서 일본 경찰에 쫓기게 된 안익태는 마오리 교장의 도움을 받아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커티스 음악 학교에 입학, 첼로와 작곡을 배우고 연주 활동을 펼쳤다.

1934년에는 헝가리로 건너가 당시 이름난 작곡가였던 도야니로부터 작곡을 공부하며, 민족주의 정신의 영향을 받았다. 또 이듬해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세계적인 지휘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지휘법을 배웠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처음 들은 것은 3ㆍ1 운동 때였다. 애국가 가사에 영국 민요 '올드 랭 사인'의 곡을 붙여 노래하는 것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 감동은 뒷날 그로 하여금 애국가를 작곡하게 했다.

애국가는 안익태가 1932년 미국에 있을 때 떠오른 악상을 그로부터 4 년 뒤에 완성한 것이다. 이 애국가는 안익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라 안팎에서 널리 불려졌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줄곧 우리 나라의 상징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우리 나라가 광복을 맞은 1945년부터 안익태는 에스파냐 국적을 얻어, 마드리드 마욜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온 세계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1957년 고국에 돌아와 자신이 작곡한 '한국 환상곡'ㆍ'강천성악' 등을 지휘했으며, 1961년에는 국제 음악제를 개최했다.

1965년 9월 17일 에스파냐 바로셀로나 병원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에스파냐의 마욜카에는 음악가 안익태를 길이 잊지 않으려는 뜻에서 '안익태의 거리'라는 이름을 붙인 길이 있다.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 선생을 기리려는 국민들의 바람에 따라, 그의 유해는 1977년 고국으로 모셔 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안익태의 어린 시절 이야기

안익태가 7 세 되던 해, 큰형이 일본에서 바이올린을 사다 줬다. "형, 이 악기의 이름이 뭐예요?"

"바이올린이라고 하지."

큰형은 바이올린을 왼손으로 들고 왼쪽 턱 아래에 닿도록 어깨 위에 얹은 다음, 말총으로 만든 활을 오른손에 들고 네 줄을 켜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가락이 흘러 나왔다. 어린 안익태는 넋을 잃은 채 듣고 있었다.

연주를 끝낸 형은 바이올린을 내밀었다.

"어디 너도 한 번 켜 봐."

"정말이에요?"

안익태는 상기된 얼굴로 바이올린을 받아 들었다.

조금 전에 본 대로 큰형의 흉내를 내며 조심스레 활로 줄을 문질렀다.

소리가 나는 게 정말 신기했다. 이 때 바이올린을 만지게 된 것이 안익태의 음악가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사진 설명>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 선생이 지휘하고 있는 모습.

김병규 기자 byung@hk.co.kr

입력시간 : 2003-06-23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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