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의 흔적을 찾아서] 백제의 마지막 명장인 계백 장군
5000결사대 이끌고 결전 끝에 백제와 운명을 같이하다

7월은 백제의 마지막 명장인 계백 장군이 돌아가신 달입니다.

삼국 가운데 유달리 온유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탄생시켰던 백제는 한성(서울) 시대, 웅진(공주) 시대, 사비(부여) 시대를 거친 뒤 서기 660년 나ㆍ당 연합군에게 멸망하였습니다. 이 백제의 멸망을 막기 위해 황산벌에서 5000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최후를 마친 사람이 바로 계백 장군입니다.

- 멸망 1 년 전 괴상한 일들 계속해서 일어나

백제가 멸망하기 1 년 전 659년. 수도 사비성에서는 괴상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백마강에 사람보다 훨씬 큰 물고기가 물 위에 떠올라 죽었는데, 이 물고기를 잡아먹은 사람들은 모조리 죽었습니다.

또 9월에는 궁궐 안 느티나무가 마치 사람이 흐느끼는 것처럼 구슬피 울었으며, 궁궐 남쪽 큰길에서는 귀신이 나타나 슬피 울다가 사라졌습니다.

궁궐 안에도 여우가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모이기만 하면 사비성에서 일어나는 이 괴상한 일에 대해 수근거렸습니다.

“이게 다 나라가 망할 징조가 아니겠소.”

“나라의 충신인 성충과 흥수를 귀양 보내고 또 계백 장군의 말도 전혀 듣지 않으니 이런 변괴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니겠소?”

“그나마 계백 장군은 귀양을 보내지 않았으니 다행이오.”

삼충사. 충남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사당이다. 성충ㆍ흥수ㆍ계백 등 세 사람의 높은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충남 문화재 자료 제115호이다.

“그건 장군이 의자왕에게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기 때문이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해 백제를 치겠다고 아우성인데, 계백 장군만큼 뛰어난 분이 어디 있겠소.”

백성들은 의자왕이 정치를 잘못한다고 만나기만 하면 수근거렸습니다.

- 왕의 향락으로 차츰 몰락의 길 걸어

계백은 의자왕이 태자 때부터 함께 보내며 삼국 통일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태자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계백에게 갑옷과 투구를 선물할 정도로 신뢰했습니다. 계백은 곧 사비성을 지키는 장군이 되었습니다.

의자왕은 왕위에 오른 지 2 년(642년) 후, 든든한 후원자인 계백 장군을 앞장 세워 신라의 대야성(오늘날 합천 지역)을 공격했습니다.

“신라의 도읍과 가까운 대야성을 공격하다니 모두가 계백 장군의 공이다.”

“전하, 신라는 지금 당나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격할 구실을 찾고 있습니다. 두 나라의 관계를 끊기 위해 당항성을 공격할까 하옵니다.”

계백 장군의 요청대로 백제는 643년 당항성(오늘날 경기도 화성시)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648년에는 신라의 서쪽 국경을 공격했습니다. 신라는 당시 정치를 잘하는 의자왕과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난 계백 장군으로 인해 백제의 상대가 되지 못 했습니다.

그러자 의자왕은 그만 자만심에 빠져 사치와 향락을 일삼기 시작했습니다.

나라를 걱정하는 성충과 흥수 그리고 계백의 충고를 멀리하며 간신배들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습니다.

낙화암. 백마강이 흐르는 백제의 궁성인 사비성 절벽에 있다. 나당 연합군이 들이닥치자 이곳에 있던 궁녀들이 스스로 떨어져 죽은 장소다.

그 사이 신라는 무열왕와 김유신이라는 명장이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660년,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치기 위해 사비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이미 당나라 군대는 백마강과 연결되어 있는 기벌포를 지났다는 소식이 백제의 궁궐 안에 전해졌습니다. 의자왕과 신하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댔습니다. 의자왕은 계백 장군을 급히 궁궐로 불러들였습니다.

“계백 장군은 들으시오. 적들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은 장군밖에 없소.”

의자왕은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백제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전하의 어명을 받들겠나이다.”

- 가족을 직접 죽인 다음 황산벌에서 최후 맞아

장군은 백제의 운명이 다했다는 것을 직감하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백제의 운명은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적군에게 포로로 잡혀 온갖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나의 손에 죽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계백 장군은 목숨보다 귀한 사랑하는 가족을 죽이고 전쟁터로 달려갔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고 적을 물리치지 않으면 나라는 망한다. 신라에 패해 노예가 될 바에야 차라리 명예롭게 죽자. 모두 나와 같이 싸우자!”

“계백 장군을 도와 신라군과 당聆構?맞서 싸웁시다.”

사비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황산벌에서 계백 장군이 이끄는 백제의 결사대와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이 맞붙었습니다.

백제군은 처음에는 신라군의 거센 공격을 네 차례나 물리치며 버텼습니다.

계백 장군의 무덤. 그의 죽음을 본 백제 유민들은 시신을 찾아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가매장했다. 최근 고증을 거쳐 이곳이 계백의 무덤임을 밝혀 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백제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준비하며 길러 낸 어린 화랑들에 의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신라군은 어린 두 화랑이 백제군에게 잡혀 목이 잘려 돌아오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습니다. ‘삼국유사’기록에 의하면 화랑 반굴과 관창의 희생으로 신라군은 용기를 얻어 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전해집니다.

계백 장군은 최선을 다해 신라군을 맞아 싸웠습니다. 그러나 18만 명의 나당 연합군을 상대로 싸우기에는 백제의 군사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결국 백제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계백 장군이 이끄는 5000 명의 결사대는 패했고 678 년을 이어 온 백제는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까지 죽이고 굳은 결심으로 백제를 구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최후를 맞은 계백 장군. 장군의 큰 조국애와 충성심은 130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김남석(작가)

■ 계백 연보>

백제의 충신이며 명장이었던 계백은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 기록이 없다. 다만 ‘삼국사기’에는 계백이 신라군을 맞아 황산벌 전투에 나서기 직전,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떠났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그의 시신이 묻힌 곳을 찾지 못 했으나, 오래 전부터 후손들과 인근 마을 사람들은 장군묘라 불리는 곳에서 제를 지내 왔다.

그리고 1680년 황산벌 옆에 충곡서원을 지어 그의 넋을 달래고 있다.


입력시간 : 2004-07-04 1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