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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의 흔적을 찾아서] 안익태 선생
평생 조국의 이름을 빛내려 노력…세계적 지휘자로 '우뚝'

안익태 선생은 국내에서 서양 음악이 불모지나 다름 없었던 시절에 일본과 미국에 유학해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우뚝 섰습니다. 그는 베를린 필하모니ㆍ로마 방송 교향악단ㆍ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등에서 지휘를 하였습니다. 이들 오케스트라는 지금도 세계적인 권위와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미국 유학 도중 오늘날의 애국가 작곡

안익태 선생

안익태 선생의 집안은 평양에서 객점을 하였습니다. 객점이란 손님이 쉬어가거나 묵어가는 집을 이르는 말입니다. 부유한 부모 덕에 선생은 어린 시절을 넉넉하게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형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오며 사다 준 바이올린이 선생을 세계적인 음악가의 길로 들어서게 했습니다.

이웃 사람들에게‘음악 신동’으로 불렸던 선생은 일본에서 유학한 다음 1930년, 첼로 하나와 작은 보따리 하나를 짊어지고는 미국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선생은 샌프란시스코 항구에서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할 일을 겪습니다.

“젊은이가 유학 왔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겠나. 얼마 안되지만 받아 두게.”

구두 수선공인 교포 할아버지는 2 달러를 주머니에서 꺼내 그에게 줬습니다. 그날 이후 선생은 힘들 때마다 머리 속에 늘 노인과 2 달러를 떠올렸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던 안익태 선생
1950년 선생이 바르셀로나 시립 교향 악단을 지휘하던 모습
선생이 작곡한 애국가 악보
안익태 선생(사진 왼쪽)이 영구구 로열 런던 페스티벌 홀에서 관계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국립현충원의 안익태 선생 묘. 마요르카에서 세상을 떠난 뒤 12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묻혔다.

“어렵게 번 돈을 나에게 선뜻 쥐어 준 그 노인을 생각하면 도저히 돈을 낭비할 수 없었으며, 음악 공부에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습니다.”

선생은 미국에서 음악 공부를 하는 틈틈이 ‘애국가ㆍ‘강천성악’ㆍ‘한국 환상곡’ㆍ‘논개’등 아름다운 곡을 작곡했습니다.

이즈음 우연히 한인교회에 간 선생은‘애국가’를 교민들이 스코틀랜드의 민요인‘올드 랭 사인’의 곡조에 맞추어 부르는 것을 봤습니다.

“애국가를 어떻게 외국곡에 맞춰 부릅니까? 내가 작곡을 해야겠습니다.”

1935년 선생은 누가 지었는지도 모른 채 전해오는 이전의 애국가 가사를 우리 나라 정서에 맞게 다시 곡을 만들어 새로운‘애국가’로 탄생시켰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부르는 ‘애국가’가 바로 선생이 작곡한 것입니다.

유럽서 연주회 때마다 한국의 모습 세계인들에게 알리려고 애써

미국 유학을 마친 선생은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유럽으로 향했습니다.

유럽에서 연주가로서는 물론 작곡가로서도 크게 성공을 거둔 선생은 계속 음악 실력을 갈고 닦아 오케스트라 지휘자라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선생이 유럽에서 유명한 지휘자로 인정 받고 있을 무렵, 우리 나라에서는 불행하게도 남과 북이 총부리를 겨누고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선생은 너무 속이 상해 미국에서 작곡하였던 ‘한국 환상곡’을 세계 무대에 올려 한국의 원래 모습을 널리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한국 환상곡’이 온 세계에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이 평생 소원이오. 이 작품에는 조국을 그리는 나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소. 나는 내 음악을 통하여 조국의 이름을 만방에 빛낼 결심이오.”

선생은 부인 로리타 탈라베라에게 이 같이 말하고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오케스트라를 연주할 때마다 한국을 세계에 더 많이 알리려고 애썼습니다.

‘한국 환상곡’에는 우리 민족의 정취, 일제의 탄압, 고통 받는 슬픔, 조국의 광복, 한국 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수난 등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리하르트 휴트라우스 등의 도움으로 세계적인 지휘자 돼

한편,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숭실중학교에서 퇴학 당했습니다. 3.1만세 운동당시 옥에 갇힌 사람들을 구출하려는 모임에 가담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유학하여 음악공부를 계속하려 했지만, 요주의인물로 지목되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숭실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서양 음악을 보급하던 마우리 박사가 일본 정부에 힘을 썼습니다.

“안익태 학생은 음악적 재능이 뛰어납니다. 일본에서 음악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선처해주십시오.”결국 선생은 마우리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습니다. 이 밖에 선생에게 도움을 준 분으로 유럽에 유학할 당시 4년 동안 학비를 후원해 준 해리 데블레스 부부, 선생의 재능을 인정해 유럽 무대에 설 수 있도록 도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있습니다.

특히 선생이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게 된 것과 ‘한국 환상곡’이 세계 무대에 많이 연주되게 된 것도 슈트라우스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안익태의 영원한 은인이자 큰 스승이었습니다.

1960년부터는 국내에서 국제 음악제 열며 한국을 세계에 알려

세계 무대에서 널리 알려진 선생은 1955년 이승만 대통령 탄생 80주년 기념 음악회의 지휘자로 초청되어 고국에서 첫 연주회를 갖습니다.

이후 1960년과 1961년에도 고국을 방문해 음악회를 열면서 본격적으로 우리 나라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국제 음악제도 개최해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1965년 제4회 국제 음악제가 취소되면서 선생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해 6월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선생은 병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안 선생님 쉬어야 합니다.”

“안됩니다. 런던에서의 연주회만큼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선생은 의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7월 4일로 예정된 런던에서의 연주회를 마쳤습니다. 알버트 홀에서 열린 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의 연주였습니다.

이 연주회에서 ‘논개’ㆍ‘비창’등을 지휘했습니다. 연주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많은 박수를 받으며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건강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서둘러 바르셀로나 마요르카로 돌아왔지만 과로로 병세는 깊어 갔습니다.

1965년 9월 16일 선생은 새벽 바르셀로나의 작은 병실에서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김남석(작가)

안익태 연보>
1905년 평양에서 태어남
1919년 3.1운동으로 숭실중학교에서 퇴교 당함
1930년 미국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학교 입학
1935년 필라델피아에서 ‘애국가’완성
1936년 유럽으로 건너가 빈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지도 받음
1939년 부다페스트 국립 음악학교에 입학
1946년 에스파냐 여성 로리타 탈라베라와 결혼
1965년 9월 17일 세상을 떠남. 정부에서 문화 훈장 대통령상 추서함

입력시간 : 2004-12-2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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