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의 흔적을 찾아서] 도산 안창호 선생
교육 계몽 운동으로 나라의 독립을 꿈꾸다

안창호(1878년~1938년) 선생은 나라가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지식의 힘을 키워야 한다며 대성학교ㆍ오산학교ㆍ흥사단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강연을 통해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몽 시키는 일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 강연 통해 독립·무실역행 역설

평양의 대성학교.
1913년 흥사단 창립 대회의 모습.
안창호 선생 무덤. 도산 공원 안에 있다.
도산공원의 안창호 선생 동상.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서 유학하던 중 러ㆍ일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 나라와 강제로 을사보호조약(1905년)을 맺고 외교권을 빼앗았습니다. 이 소식은 태평양 건너 미국에 까지 전해졌습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당장 고국으로 돌아가 할 일을 찾아 봐야겠소.”

선생은 아내와 자식을 낯선 땅에 두고 유학한 지 5 년 만인 1906년에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 마다 사람을 모아 놓고 연설을 했습니다.

“우리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맨손만 갖고는 절대 독립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조선이란 말을 사용하지 맙시다. 우리 나라의 이름이 ‘대한 제국’이므로 ‘대한 사람’으로 부릅시다.”

안창호 선생은 강연 끝머리에는 ‘무실역행’이란 노래를 가르쳤습니다.

무실역행은, 맡은 일을 성실히 하되 힘을 들여 성의껏 행하자는 뜻입니다.

- 국외 동포들도 적극적으로 지도

안창호 선생은 나라가 바로 서고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교육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뜻 있는 사람들과 대성학교를 세웠습니다.

“대성중학교 학생들은 거짓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은 말고, 꿈에라도 성실하지 못했다고 여겨지면 뉘우치세요.”

당시 선생의 강연을 들었던 이승훈 선생은 오산학교를 세우는 데 보태라며 자신의 집을 헐어 재목(材木)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훗날 이승훈 선생이 훌륭한 교육자가 된 것도 선생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선생의 행동을 눈여겨 보던 일본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감옥에 가뒀습니다.

선생은 두 달 동안 헌병대에서 고생하다가 겨우 석방이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망명하여 우리 나라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소.”

선생은 만주ㆍ연해주ㆍ미국을 돌며 동포들을 지도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 끝없는 일본의 방해

“나라가 망한 이 때에 무슨 교육 사업을 한다고 그러시오. 쯔쯧!”

모두 반대하는 바람에 안창호 선생은 시베리아를 거쳐 도이칠란트 그리고 영국 등으로 떠돌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미국에 도착한 선생은 사무실 청소를 하러 다녔습니? 그러자 교민들이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조금씩 돈을 모았습니다. 이 돈으로 큰 일을 하십시오.”

안창호 선생은 1912년 11월에 샌 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총회장이 되었습니다. 이후 중국에서 상해 임시정부 건물을 얻었습니다.

“나라는 잃었지만 이곳에서 청년들을 키워 나라의 독립을 이뤄야 합니다.”

선생은 만주에 이상촌 건설을 위해 터를 보러 다녔습니다.

그러나 만주에 일본군이 들어오면서 꿈은 무너졌습니다. 이후 남경에 이상촌을 건설하려고 땅을 샀는데, 이곳도 일본군이 들어오면서 모두 빼앗겼습니다.

- 독립 못보고 감옥서 숨져

그러던 어느 날 윤봉길 의사가 홍구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행사를 벌이던 일본의 관리들이 죽거나 크게 다쳤습니다. 이 일로 안창호 선생은 다시 붙잡혀 서울로 끌려왔습니다. 5 년간 옥살이를 한 선생은 1935년 봄에 풀려났습니다.

안창호 선생은 석방 후 고향에서 잠시 머물다 깊은 산골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찾아와 선생의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선생,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가시오. 우리 일본이 여권을 만들어 드리겠스무니이다.”

“이 늙은이가 대체 무슨 일을 한다고 쫓아 내려고 그러시오. 허허!”

일본 헌병들은 그러나 약속과 달리 선생을 강제로 끌고 와 종로경찰서에 가뒀습니다. 몇 달 후 안창호 선생은 몸이 너무 나빠져 경성의전(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1938년 3월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안창호 연보>
1878년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에서 안흥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남.
1897년 밀러학당 졸업. 독립협회 가입.
1902년 이혜련과 결혼, 미국 유학.
1907년 국내로 귀국. 비밀 결사 신민회 조직.
1908년 평양에 대성학교 세움.
1913년 흥사단 창립
1919년 상하이 대한임시정부 국무 총리 서리 취임.
1923년 만주에 이상촌 건설 계획 세움.
1930년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결성.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 수감.
1938년 경성 제국 대학 부속 병원에서 사망. 망우리공동묘지에 묻힘.
1973년 도산공원으로 묘소 옮김.

/김남석(작가)

입력시간 : 2005-02-15 1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