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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의 흔적을 찾아서] 우장춘 박사
씨 없는 수박·제주도 감귤 개발 등
우리 나라 농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


우장춘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탄생시킨 과학자입니다. 우 선생은 1950년 우리 나라의 농업 발전을 위해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해 부산시 금정산 자락의 한국농업과학연구에서 우리 나라 육종 발전을 위한 첫발을 내딛습니다. 선생은 이후 씨 없는 수박을 비롯해, 배추와 무가 함께 자라는 채소ㆍ제주도 감귤 등 다양한 육종 상품을 내놓습니다.

◇ 나라의 부름 받고 귀국

씨 없는 수박. 1953년 한국에서 이 수박을 처음 만들어 재배했다.
부산 동래구청에 자리한 우장춘기념관. 박사가 육종 연구 때 썼던 현미경과 유품 10여 점이 전시돼 있다.
토마토 감자. 줄기에서는 토마토가 자라고 뿌리에서는 감자가 자란다.
자유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모은 부의금으로 원예시험장 안에 우물을 파 '자유천'으로 이름지었다. 박사는 매일 아침 여기서 나온 물로 세수를 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우장춘 귀국 환영 대회의 모습.
우장춘의 묘. 수원 농촌진흥청 안 여가산 기슭에 있다.

광복 당시 우리 나라는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80 %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배추나 무 등 채소의 씨를 만들 수 있는 사람과 회사는 없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으로부터 채소 씨앗을 들여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광복 후 우리 나라는 일본과 교류를 단절했기 때문에 채소 씨를 일본으로부터 수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한국이 일본에서 육종학자로 널리 알려진 우장춘 박사에게 육종 개발을 부탁한 것이지요.

“일본에서 태어나서 여태 사신 분이 왜 한국에 가시려고 합니까?”

“비록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았지만 한국은 나의 고국입니다. 조국의 동포들이 내가 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야지요.”

우장춘 박사는 동료들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에서 급히 귀국했습니다.

◇ 일본서도 늘 고국 잊지 않아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은 명성 황후가 시해되던 당시 별기군 훈련 제2대대장이었습니다.

그는 일본군 수비대와 함께 궁궐에 침입, 명성 황후의 시해를 방조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 파천’이 일어나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그는 여기서 사카이와 결혼, 우장춘을 낳습니다. 하지만 고영근에게 암살 당해 우장춘은 일본 국적을 갖고 살았습니다.

“너는 조선인이다. 성은 우씨이고 이름은 장춘이다.”

어머니는 어린 우장춘이 항상 조선인임을 잊지 않도록 성심껏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에 동생이 태어나자 우장춘은 3 년간 고아원에 맡겨집니다. 어머니 혼자서 형제를 키우기에는 너무 가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어머니는 아버지의 묘터를 팔아 우장춘을 집으로 데려옵니다.

우장춘은 나중에 도쿄 제국 대학 부설 농학실과를 일본인이 아닌 조선 유학생 신분으로 당당하게 입학했습니다. 조선인으로 남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육종 연구소에 근무하며 이름을 알립니다.

◇ 육종 연구에 많은 업적 남겨

일본에서 30 년을 육종 연구에 바친 선생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귀국해 부산 금정산 기슭 ‘한국농업과학연구소’에 보금자리를 틀었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우장춘 박사를 서울로 불러 격려했습니다.

“우 박사, 대한 민국에 와서 고생이 너무 많소이다.”

“학자는 옷이나 고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연구에 몰두할 많은 시간과 그렇게 할 수 있는 장소만 바랄 뿐입니다.”

우장춘 박사는 이처럼 자신의 불편한 환경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오로지 육종 연구에만 몰두했습니다. 심지어 일본에 사는 장녀 결혼식에도 참석치 않았고, 어머니의 장례식조차 가지 못했습니다.

우장춘 박사가 일본에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 우리 정부에서 못 가게 막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대체 이런 조국을 위해 내가 가족을 버리고 왔단 말인가! 하지만 조국이 나를 알아 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우장춘 박사는 한국에 살면서 때로는 비통해 하며 슬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애국심으로 온갖 고민과 어려움을 이겨 내고 연구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1959년 8월 10일 많은 업적을 남기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생은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 나라의 농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에도 널리 존경 받고 있습니다.<끝>

☆ 우장춘 박사 연보 ☆

1898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남.
1902년 아버지가 자객에게 암살 당함.
1919년 일본 도쿄 제국 대학 농학부 졸업.
1920년 육종학의 연구 시작함.
1950년 귀국함.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초대 소장이 됨.
1954년 어머니 세상을 떠남. '자유천' 만듦.
1957년 제1회 부산시문화상(과학상)을 받음.
1958년 농사원 원예시험장 책임자가 됨.
1959년 세상을 떠남. 수원 농촌진흥청 안 여가산에 묻힘.

/김남석(작가)

입력시간 : 2005-02-2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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